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론 브란도 (문단 편집) == 사생활 == 동시대 대부분의 할리우드 스타와 달리 자신의 [[양성애]] 성향에 대해 감추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. 덕분에 [[커밍아웃]]하지 않았던 다른 동료들까지 본의아니게 끄집어내는 결과가 되기도 하는데, 2006년 출간된 [[전기(동음이의어)#s-2|전기]]에서 브란도와 관계를 맺었을 거라 주장한 유명인들만도 [[폴 뉴먼]], [[몽고메리 클리프트]], [[버트 랜캐스터]], [[로런스 얼리비에이]], [[제임스 딘]], [[타이론 파워]] 등을 포함하고 있다. 그러나 전형적인 [[난봉꾼]] 할리우드 스타의 가십 같은 이야기 속에 나름 순애보 같은 이야기도 있는데, 바로 평생 친구 겸 '동성'애인으로 지낸 배우 겸 코미디언 월리 콕스(Wally Cox)의 경우. 말론 브란도는 1973년 사망한 콕스의 시신을 화장하고 남은 재를 평생 보관하며, 가끔 외로울 땐 재를 담은 단지를 앞에 두고 식사를 했다고. 브란도 사망 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되어 콕스의 재와 섞여 같이 [[타히티]]와 [[데스밸리]]에 나뉘어 뿌려졌다. 말론의 장례식은 [[잭 니컬슨]]이 주관했으며 영화 제작자 마이크 매더보이(Mike Medavoy) 저택에서 치러졌다. [[워런 베이티]], [[아네트 베닝]] 부부와 [[숀 펜]] 등등이 참석했고, 유족의 뜻을 받아들인 잭 니컬슨이 언론 노출을 최소화시킨 비공개로 치른 가족장이었다 한다.[[https://www.fox19.com/story/2334747/brandos-ashes-scattered/|링크]] ||[youtube(Zs9TSzseyN4)]|| ||{{{#!wiki style="text-align: center" [[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]] 中에서}}}||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, "콕스가 여자였음 결혼해 평생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"라고 언급하기도 한 그였으니.[* 당시 [[동성결혼]]이란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시대라 콕스가 "[[여자]]였으면" 결혼했을 것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추정된다. 말론 브란도와 월리 콕스가 적어도 8-90년에 태어난 인물들이였으면 둘의 결혼이란 충분히 가능했을 일이다. 시대에 맞지 않게 태어난 안타까운 비운의 연인.] 이 부분은 [[2015년]] [[1월 4일]] [[신비한 TV 서프라이즈]]에서 다뤄졌다.[[http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06&oid=312&aid=0000065621|해당기사]],[[http://m.ilyo.co.kr/?ac=article_view&toto_id=&entry_id=59770|마성의 양성애자 말론 브란도]]. 작가이자 접지 편집장이었던 뷰리가드 휴스턴-몽고메리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[[대마]]에 취해 있을 때 콕스와 사랑하는 관계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고.[* 마초남인 말론 브란도와는 달리 월리 콕스는 왜소하고 부드러운 인상을 가졌다.--실제론 근육졌지만...--] 콕스의 사망은 브란도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고 하며 콕스의 사후 앞에 언급됐던 것들을 포함해 그의 파자마를 입고 취침을 하거나 창가에서 그의 유골 단지를[* 말론 브란도가 당시 콕스의 부인에게 직접 그의 재를 뿌리기 위해 콕스의 유골 단지를 넘겨달라고 요청했고 그녀는 브란도를 믿고 넘겨줬는데... 이후 뿌려진 게 아니라 브란도가 그녀 몰래 보관하고 있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고 한다.] 껴안는 등 배우자를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한다. 이 때문에 당시 콕스의 과부가 그의 유품들을 브란도한테서 돌려받기 위해[* 미국은 누군가 사망하면 법적상 배우자가 모든 것의 우선권을 갖고있다. 즉, 콕스의 부인이 죽은 남편의 유골함을 남에게 넘겨준 것도 브란도를 매우 신뢰했다는 건데 그녀를 속인 것도 모자라 남편의 재를 자기 것 마냥 가지고 있던 브란도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.] 법적으로 소송하려고 했지만 "브란도가 더 필요할 것 같다고" 생각해서 포기했다고 한다.[* 다만 콕스의 전 부인들은 남편과 말론의 관계는 친구 이상으로 넘어가지 않았다고 했으며 그들의 소문은 단순한 [[루머]]라고 단정지었다. 하지만 콕스의 죽음 후 말론의 기이한 행동들을 포함해 그가 언급한 발언들 및 콕스의 유품 소송 포기를 생각하면 둘의 친밀한 관계를 인지는 했으나 '''아내'''로써 부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후 콕스의 이미지를 더럽히기 싫어서일 수도 있다. 당시 동성애는 큰 화제거리의 요소였으며 배우의 이미지를 더럽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.] 연기자로서의 성공과는 달리 사생활에서는 여러모로 불운했다. 여러 번의 결혼 실패에다 1990년엔 아들이 [[살인죄]]로 구속되기에 이른다. 게다가 아들이 살해한 상대는 다름아닌 딸의 약혼남. 말론의 딸도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말았다.[* 기이하게도 브란도가 《대부》에서 맡은 역할인 비토 콜레오네 역시 극중에서 아들이 딸의 약혼남을 살해했다. 배역의 상황이 비극적이게도 배우의 현실에서도 나타난 것. 이 일화가 한국의 [[신비한TV 서프라이즈]]에 소개되기도 했다.] 이처럼 평생동안 안정된 가정을 꾸리지 못했고 [[우울증]]과 [[알코올 의존증]]에 시달렸다. 말년에는 [[https://i.redditmedia.com/flDgO4o9ppYeQRM-blX0PrP1DIHfsL3-R4_buakAJhk.png?s=7e26cbe3f0ecdfd032860baad4c3d31d|우울증으로 인한 폭식으로 몸무게가 무려 150kg을 넘는 뚱보가 되기도 했다.]] 사실 청년기의 인기에 비해서는 말년으로 갈수록 출연작이 드문드문하고 아들이 재판을 받느라 돈이 급해서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영화에 나오느라 작품의 수준도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. [[슈퍼맨(영화)|슈퍼맨]]이나 [[지옥의 묵시록]] 이후론 사실상 인상적인 출연작이 없었을 정도. 다른 남자배우들이 대부분 50대에 전성기를 맞는다는 걸 생각하면 40대 이후 브란도의 필모그래피는 좀 부실한 감이 있다. 1980년 이후로는 거의 매스컴에 얼굴을 비추지 않고 은둔 생활을 했다. 다만 인권운동에는 적극적인 활동을 보였다. 1990년 아들이 잡혀들어간 이후 《프레쉬맨》, 《크리스토퍼 콜럼버스》, 《돈 후앙》, 《[[닥터 모로의 DNA]]》 등에 나오면서 오랜만에 활발한 필모그래피를 선보였다. 그의 마지막 작품은 2001년에 에드워드 노튼,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 찍은 《[[스코어(영화)|스코어]]》였다. [[2004년]] 폐질환으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. 《[[스코어(영화)|스코어]]》 이후 3년 만에 신작에 나오겠다고 약속을 한 터라서 팬들의 안타까움이 더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